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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이 있다

망한 우주 2012. 10. 16. 02:41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 순간이 있다.
부엌에는 담담한 벽시계. 정오의 숲을 횡단하는
맹목적인 구름의 한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걸어만 다닌 스프린터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평온한 육체 속에서 만나는
낯익은 바람. 나무. 나무. 다시 바람.
일생이 온통 아이덴티티에 관한 격조 높은 희극이야.
서울은행 통장에 남은 이십오만원의 잔고.
날품 팔 듯 살다 간 자들의 영혼이 북경반점 창문가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네. 다시 바람. 호명.
오늘 내 사소한 하루에 영구 입주한 그대.
그대가 좋아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지금
오래된 약물의 힘을 몸 안에 느끼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것, 그러므로
오늘밤의 목표는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신촌을 걷다 만난 옛 여자는 <그만두라>고 말했지.
너는 사소한 자, 거리에서 세계를 유추하지 말라, 고.
바람, 창 밖의 나무. 굽은 등으로 나무 곁을 지나가는
19세기 화가. 그의 여자 마리 샬레는 거리의 여자였네.
액자 속에 조용히 걸려 있는 물랭루즈의 음악처럼
구름이 흘러가. 등고선을 따라 천천히 하강하는
로코코식 실내의 오후. 그리고 바람. 호명.
이제야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 순간이 있다.

 

- 이장욱, 로코코식 실내